p. 22

살아보지 않은 앞날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앞날은 밀려오고 우리는 기억을 품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그렇게 불완전한 게 기억이라 할지라도 어떤 기억 앞에서는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리게 된다. 그 무엇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의식들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기억일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이 왜 그렇게 힘겨웠는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왜 그리 또 두려웠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그 벽들을 뚫고 우리가 만날 수 있었는지.


p. 28

—이런 날이 다시 올까?
꽃사과를 따며 누군가 툭 던진 말이 우리들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똑같은 날은 없어.
우리들 중 누군가가 서글프게 맞받았다. 방금 전까지 와르르 쏟아내던 웃음을 거두고 서로 눈치 안 채게 유리창 안에서 우리를 내다보고 있는 윤교수를 바라보며 각자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p. 53

—언제부터 거미를 무서워했어?
—오래됐어.
—근데 왜 내가 몰랐지?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성장했는데도 단이가 거미를 그리 두려워하는 줄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모를 수밖에.
—응? 무슨 큰 비밀이었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모르는 거야.


p. 82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험난한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며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와중에 있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종교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그러나 물살이 거세기 때문에 그냥 건너갈 수는 없어.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기도 할 테지. 지금 여러분은 당장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나 뗏목이 되어줄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 실어나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여러분이 그것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이 역설을 잘 음미하는 학생만이 무사히 저쪽 언덕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여러분에게 문학이나 예술은 여러분을 태워 강 저편으로 건네주는 것만이 아니네. 여러분이 신명을 바쳐 짊어지고 나가야 할 필생의 일이기도 한 것이네.


p. 104

—서른셋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저자들의 책이네. 한때 수집을 했었지.
서른셋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자들……이라고 속으로 음미하며 윤교수를 바라보았다.
—왜 하필 서른셋이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군. 글쎄 서른셋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간 나이고 알렉산더가 거대 제국을 건설하고 죽은 나이지. 서른셋이 지나면 더이상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요절이란 말도 서른셋이 되기 전 죽은 자들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니겠나. 예술가들에겐 요절은 때로 영광이지. 그들의 작품이나 저작은 내게 연민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어. 관심이 있으면 가져다 봐도 좋아.


p. 106
—자, 젊은 크리스토프들!
누군가 윤교수의 목소리를 흉내내었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답변 좀 누가 해보게.
모두들 그가 쳐드는 책 제목을 쳐다보았다. 문장론 시간의 교재인 ‘예술이란 무엇인가’였다.
—데모 안 하는 것!
누군가 자조적으로 외치자 명랑한 분위기였던 사방이 일순 조용해졌다.
—예술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어? 돈을 버는 법도 취직하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아. 그렇다고 연애를 어떻게 해야 잘하는지 알려주는 것도 아니잖아. 데모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려 주지 않고 말이야!
누군가 침울해진 분위기를 바꾸어볼 양으로 과도하게 목청을 높였으나 잔디밭의 분위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누군가 벌렁 뒤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랭보는 말했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일은 값싼 술을 마시고 취한 채 해변에 드러누워 자는 것이라고.
—그럼 술에서 깨어난 다음엔 무얼 할 건데? 무얼 할 수 있는데?
—다시 값싼 술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거지.
—대책 없는 녀석. 그런 철 지난 보헤미안의 포즈로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


p. 218


눈이 내리는 왁자한 시장통에서 금이 간 머리통이 달린 참새를 집었지. 무슨 오기였을까. 피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머리통 쪽을 어금니로 깨물었어. 내 입안에서 새의 머리통이 오도독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지…… 그때의 그 절망만큼.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나는 성벽에 대고 있던 손을 거두고 일행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았다. 그를 향해 돌아섰다.
—오늘을 잊지 말자, 이 말 하려고 그랬지?
그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지고 곧 입가에 쑥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가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나는 손을 빼서 그의 손을 더 힘껏 쥐었다. 오늘을 잊지 말자, 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적해져 있었다. 상실될 걸 알고 있는 이의 고독이 묻어 있었다.


p. 408

나의 제자들에게.
소식을 들었겠지만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일해왔던 이 학교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는 시대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내 건강이 더이상 내가 교단에 서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어서입니다. 이미 총장 앞으로는 사직서를 써서 보냈고 별도로 재단 이사회 앞으로도 간략한 편지를 써서 보낸 후 차분히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생업으로 알고 봉직해온 일터를 떠나면서 여러 가지 느낌과 생각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눈길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나의 동료들이나 가족의 시선과는 다른 각도에서 내 마음을 압박합니다. 내가 좀더 버텨주기를, 아니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촉구하는 무언의 부탁과 질책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평생 말을 다루고 말과 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시인인 나에게 지금 이 시대는 시련의 연속입니다. 말이 제 값어치를 잃어버린 시대, 그리하여 온갖 부황하고 폭력적인 말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는 더이상 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에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 절망이 인생에서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교단에서 물러나지만 최선을 다해 살 것이며 건강을 돌볼 것이며 무엇보다 그동안 중단한 시를 쓸 것입니다. 그것을 나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시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던진 투사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적으로 모든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혼자 고결함을 찾아가는 은둔자도 아닙니다. 비록 학교를 떠나지만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며 비록 이 시대의 거친 언어에 좌절했지만 계속 시를 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학교를 떠나기로 한 나의 결정을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과 만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주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종종 들려주었던 물을 건너는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 480

만일 내가 그녀의 편지에 쓰인 날짜에 제대로 도착했다면 나는 그녀를 살릴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결정된 것이었고 다만 그녀는 나를 그녀의 죽음의 첫 입회인으로 맞이하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네……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 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

p. 253

윤교수는 이런 얘기도 해주었다. 루쉰이 일본 유학생이었을 때 일본인 선생이 참배할 곳이 있다며 루쉰을 비롯한 학생들을 뒤따르게 했는데, 데리고 간 곳이 오차노미즈에 있는 공자 사당이었단다. 공자로 상징되는 전근대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유학을 온 루쉰으로서는 그때의 참배가 상당한 충격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머나먼 타향에서 만난 은사가 자신이 버리고 온 옛것 앞으로 데려가 참배하게 했을 때 루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윤에게 그 시집을 사다주려고 어제 그 서점엘 찾아갔다. 서점 주인은 팔지 않는 시집이라고 했다. 삼십 년 전에 첫사랑이 선물로 준 자신의 소장본이라고. 매우 아쉬워하며 나오는데 서점 주인이 학생! 하고 나를 부르더니 첫사랑에게 받았다는 시집을 내주었다. 시집 값을 치르려고 하니 주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얼마를 주려고? 삼백오십원? 그럼 얼마를? 학생에게 주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학생만 지니고 있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 있거든 학생도 그 사람에게 주도록! 다시 서점 안으로 발길을 돌리는 서점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윤교수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은 모두 다 자기 방식의 가치기준이 있다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만 떠오른다. 진실과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정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폭력적이거나 부패한 사회는 상호간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더 폭력적으로 된다.

나부터 독립적이고 당당하길 바란다. 숨김이 없고 비밀이 없으며 비난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원한다.

—갈색노트 6





p. 279

—윤미루.
에밀리가 일곱 번쯤 그림자를 잡으려다 놓치는 걸 보다가 나는 더이상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윤미루의 이름을 불렀다.
—나도 네가 궁금했어.
—……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한 이후로 다른 사람과 함께인 것보다 혼자가 좋아. 그게 익숙해.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너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이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봐.
—응?
—나도 혼자인 게 좋아. 내가 너를 아프게 할까봐 네 곁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도 했었어. 혹시 말이야, 나 때문에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나를 미워하진 말아줘.
—……
—내가 너를 아프게 하면 나를 잊어버려. 기억하지도 말고.
—왜 그런 말을 해?
—아니야…… 정윤, 나를 기억해야 해. 잊지 말아야 해.









* 보통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은 이상하리만치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그 당시 군부독재에 시달리던 청춘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오면서, 그들이 갖고 나왔던건 비단 무기만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그 시대의 청춘들에겐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열정과 이상과 그 외 모든 숭고한 인간정신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물리적 무기를 압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슬프지만 21세기에서는 찾기 힘든 것들. 20세기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그 시대의 아픔을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쏟아내었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상황으로 하여금 인간 내부에서 잠자고 있는 열정과 이상과 낭만을 밖으로 끄집어내기도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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