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31
수정은 혼란스럽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훌륭하게 자신에게 어룰리는 태도를 껴입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옆 학교 학생의 자살소식을 들었을 때에 어울리는 태도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나 혼자만, 나 혼자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정은 불안하다. 피곤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니면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야 할지 아니면 하늘을 보고 탄식하는 게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하다. 창밖으로는 흰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고 구름 사이로 가끔식 해가 고개를 내미는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고 있어도 좋은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p. 33
그러자 거기, 친구의 자살소식을 전해들은 여학생의 완벽한 상징이 앉아 있다. 그녀에게서는 정교하게 짜인 수학식 같은 아름다움이 풍겨나온다. 수정은 노트를 펼쳐놓고 그 식을 풀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p. 55
그렇다면 그것은 정신 혹은 영혼의 문제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다. 미나의 부모가 평균에 비해 월등한 수준의 정신과 교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평균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미나의 어머니는 시의 중심에 넓은 캠퍼스를 펼쳐 놓은 값비싼 사립대학을 나왔다. 학창시절에는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에 열중했으며 지금은 당당한 전문직여성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녀의 교양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그녀는 단지 유행가를 따라 시대의 유행에 발맞춰나갔을 뿐이다. 그녀는 유럽산 가방 대신에 유럽산 철학과 혁명이 유행하던 시대를 살았고, 만약 지금이 그녀의 청춘기라면 그녀는 기를 쓰고 유럽산 가방을 모으며 누구보다 행복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황혼의 나이가 다 되어서야 이런 아름다운 유행이 찾아온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면세점에 가득 쌓인 유럽 상품에 몰두했다. 그녀는 지금 천박한 졸부의 아내처럼 보이며 따라서 그녀는 행복하다. 그녀는 유행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




p. 68
수정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아카시아꽃 향기로 숨이 막히는 산책로를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다 말고 갑자기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우주가 나를 싫어하셔."
햇살은 반짝거리고 구름은 깨끗하다.
"미안해."




79-80p.
칸막이, 즉 시스템은 학생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만 그것의 미래를 근심하는 학생은 칸막이 안에 없다. 학생들은 이것이 자신이 선택한 미래라며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칸막이 안으로 기어들어올 것이다. 아직 순결한 학생의 급진성은 결국 시스테의 보수성에 의해 잘게 부서지겠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목을 조르면서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고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겠다. 아무런 충고도 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다. 어떤 곳에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 어차피 모든 것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쌓지 않겠다. 순결한 마음들은 그런 식으로 잘게 부수어져 시스템 안으로 편입된다. 시스템에 편입된 개별적인 인간은 주위를 돌아볼 줄 모르며 본능적으로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은 채 편리하게 이익만을 취하고 자신의 수동성을 망각하려 한다. 그렇게 여전히 혼자이고 손내밀 줄 모르는 채로, 완벽하게 개인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집단에 순응적인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오직 필요한 것만 취한 채 책임도 권리도 회피하는 방식의 삶, 그것이 바로 집단이 원하는 삶이다. 집단적인 의무가 싫다, 같은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요구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익명의 소비자들처럼 돈을 지불하고 합당한 서비스를 취한 채 영수증 정도만 쥐고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잠들고 싶다, 타인과 이야기하는 것은 피곤하다, 제발 좀 혼자 내버려두라, 나를 제발 좀, 제발, 제발, 외롭게 혼자 죽도록 내버려두라. 그렇게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집단에 짓눌려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가장 고립되고 개별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며 미소 속에 눈을 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눈동자를 짓누르는 시스템의 미소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삶도 죽음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삶과 죽음이 도처에서 반복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을 서서히 질식시켜가고 있다. 아무리 거부하려고 하여도 집단의 룰은 사람들의 심장 속까지 스며들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은 심장을 떼어내는 길, 죽음뿐이다.
이것이 바로 편리한 소비자의 비극이다. 소비자는 레스토랑이 가격을 올리는 것에 절대로 항의할 수 없다. 자신이 가진 돈에 어울리는 것을 갖거나 지갑에서 돈을 좀더 꺼내는 가능성뿐이다. 소비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좀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가장 없는 자의 것을 조금 더 빼앗는 동안에도 시스템은 계속될 것이다






p. 197
민호의 가풍은 누가 무슨 행위를 하든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그저 개인의 특성으로 보고 여유롭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런 가풍은 민호 집의 자랑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부모의 고유한 가치관이라기보다는 그의 부모와 그의 부모의 친구들과 그의 부모의 가족들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관, 분위기이다. 누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것을 그저 인정하기. 인정하기. 인정하기. 그들은 인정하기라고 생각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만족의 미소를 지었으나 결국 그들의 자녀는 그저 타인에게 무감해졌을 뿐이다.











p. 308
"예를 들어서. 모두가 말하는 것. 예를 들어서. 친구를 짓밟고 올라서라. 숨이 막혀온다. 이런 건 다 비유잖아? 아무런 힘도 없이. 나는 진짜가 필요했어. 예를 들어서. 나는 니 손을 밟아 으스러뜨렸어.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진짜 밟는 거랑 비유적으로 밟는 거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이제 나는 알았어. 차이가 없어. 이것 봐. 아무 느낌도 없어. 이렇게 니가 죽었는데도 나는 아무 느낌도 안나. 죽어 있는 너는 살아 있는 너보다 더욱더 안 느껴져. 그리고 그건 아주 잘된 일이다."






-



해설 p. 315
친구를 죽여서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수정의 태도는 이십사 시간 '접속'상태인 21세기 십대들의 분리장애를 짐작케 한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나 성장한 세대들은 의식이 깨어 있는 내내 누군가와 접속되어 있다. 그들은 쉼없이 서로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하고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온라인 상태의 상대를 확인한다. 'On세대'들에게 있어 'Off'는 단절이며 죽음이고 혼동이다.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확인할 수 없을 때, 서버로부터 이탈된 전자신호들처럼 체계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해설 p. 316-317
수정은 미나를 통해 진짜 '수동성'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패배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갈구하는 답답함이다. 따라서 수정은 미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좌절을 미나를 파괴하겠다는 타나토스적 욕망으로 전복한다. 이해할 수 없다면 파괴하면 된다. 외재적 힘에 의한 수동성 결핍은 파괴를 통한 능동적 결여로 전도되고, 이에 상실감은 봉쇄된다.

해설 p. 321
고양이 살해를 통해 김사과는 애착하는 것을 파괴해야 진정한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타인과의 존재론적 동일시라는 것 자체가 체제가 제공한 주술인 셈이다. 이어폰을 낀 혁명가들은 외계를 단절함으로써 공명을 감지하고 혁명을 꿈꾼다. 중요한 것은 이어폰을 낀 혁명가들의 손에 마트에서 산 칼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하다. 아무래도 좋은 것뿐인 세계에는 아낄 것도 없고, 소중할 것도 없지.



* 18년에 새기고 살 것. 여태껏 버릴 걸 골라내고 쓸 걸 챙기는 게 정리인 줄 알았지, 필요한 걸 고르고 그렇지 않은 걸 버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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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고 싶었다.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 장래 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만은 한도 여한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다가 양지 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불에 타거나 물에 쓸려 가거나 무너지는 건축물에 깔리는 일 없이, 조금 더 바란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자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요즘처럼 사람의 죽음이 험한 세상에서 평생을 좋은 일을 하고 정갈하게 살아도 찾아올까 말까 한 지복을 바라는구나 너는, 하고 웃었다. 그 정도가 지복이라면 요즘의 인생이란 서글픈 것이로구나, 지나가듯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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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현타 유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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